글번호
43132
작성일
2017.08.09
수정일
2017.08.09
작성자
조선경
조회수
17

[국제신문/세상읽기]수여(授與)제도를 다시 생각한다 - 전성욱 한국어문학과 교수

 | [국제신문/세상읽기]수여(授與)제도를 다시 생각한다 - 전성욱 한국어문학과 교수

 



 

 

 

[국제신문/세상읽기]수여(授與)제도를 다시 생각한다
- 전성욱 한국어문학과 교수

 

 

 

 

 

 

전성욱
한국어문학과 교수

   송경동 시인이 미당문학상의 후보 추대를 거절했다. 나는 이 시인의 단호한 결정이 정의로운 문인의 윤리적 결단이라고 믿는다. 그의 결단은 친일문인을 기리는 문학상에 대한 최근의 논란에 다시 불을 붙였다. 친일 문인의 이름을 딴 문학상에 대한 거부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소설가 황석영과 공선옥이 동인문학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평론가 최원식이 팔봉비평문학상의 수상을 사양하였다. 이런 식의 거부나 사양은 자신의 소신과 의지를 표명하는 작가의 양심적 행동이라는 점에서 상을 받는 것만큼이나 세상의 주목을 이끈다. 

 



   
상이란 어떠한 성취에 대한 공적인 존중의 표현이다. 수여제도는 그렇게 공을 세운 자에게 상(賞)이라는 영예를 줌으로써 공공의 귀감으로 삼는 문화적 장치인 것이다. 그러나 그 주고받음에 사사로운 의욕이 개입함으로써 상의 영예가 추문으로 더럽혀지는 사례는 허다하다. 아무런 조건을 걸지 않고 주는 것을 '순수한 증여'라고 하는데, 차고 넘치는 그 많은 상이 과연 답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마음으로 주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돈과 명망을 증여하는 대신 세상의 환심을 답례로 얻으려는 속내, 그 세속적인 교환의 공리는 순수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 하겠다. 

 



   
대체로 상을 둘러싼 추문은 그 수여의 공정성에 대한 시비로부터 비롯된다.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사적인 연루가 상의 공공성에 치명상을 입히는 것이 그 단적인 사례이다. 선생이 제자를 챙기고, 선배가 후배를 챙기는 그 기묘한 수여의 패거리주의는, 주고 난 뒤에 충성을 요구하는 세속적인 권력의 한 적나라한 양상이다. 상의 진정한 권위는 그런 이해와 타산을 넘어선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순수한 증여, 그 공적인 대의의 실현으로써 확보될 수 있다. 

 



   
우리에게 그런 상이 없는 것이 아니다. 만해와 단재의 이름을 기리는 상이 있고, 상금은 없지만 동료와 후배들이 주는 '아름다운 작가상'이 있다. 그럼에도 상을 둘러싼 분란이 그치지 않는 것은, 예의 그 배타적인 패거리주의가 주지 못하고 받지 못하는 자들의 자괴감과 패배감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예컨대 종신 심사위원제로 운용되고 있는 동인문학상이, 콩쿠르문학상의 그 제도처럼 심사위원의 '책임'과 '신뢰'를 얼마나 공인받고 있는지 의문이다. 무엇보다 한국의 문학상들은 그 몇몇 유력한 명망가로 이루어진 심사위원들의 시야에 들지 않는 무연고의 작가들, 이를테면 지역의 작가나 비주류의 출판사와 문예지를 통해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들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혹은 문단 주류의 양식과는 거리가 먼 장르문학에 대해서 완고한 태도를 취하고 있지 않은가. 

 



   
수여제도에 대한 문제 제기를, 받지 못하고 소외된 자들의 열패감 따위로 간단하게 매도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 격앙된 항의가 세련되지도 않고 섬세하지도 못하다고 간단하게 일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식의 응대로 반대자들의 목소리를 묵살해온 이들의 그 고고한 '지성'이란 얼마나 대단한가. 친일문인을 기념하는 상을 둘러싼 논란, 그 시끄럽고 과격한 항의들. 물론 친일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친일이라는 행적에는 저항이냐 협력이냐의 거친 이분법으로 명료하게 단정지을 수 없는 복잡한 내력이 있다. 그 복잡한 내력은 깊이 사유되어야 하고 치밀하게 연구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사유와 연구가 그들을 기념해야 하는 유력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친일의 문제가 여전히 논란이고, 친일 문인을 기리는 문학관이나 문학상의 제정과 운영이 번번이 분쟁으로 비화하는 것은, 제때에 제대로 앓았어야 할 진통을 회피하고 넘어갔기 때문이다. 반민특위는 정치적으로 무산되었고, 친일에 대한 학문적 논의는 민족주의의 이념에 자주 가로막혔다. 친일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정리'하거나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삼으면, 결국에는 '단죄'하거나 '처벌'하는 것으로 쉽게 타결되어버리고 만다. 친일 문인의 이름을 건 문학상을 심사한 사람이나 수상한 사람들을 마치 친일 반민족 행위자처럼 비난하는 것은 그런 단순 소박함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물론 그 논란의 상을 주고받았던 그들의 행적은 그것을 거부했던 이들과의 대비 속에서 윤리적인 판단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것이 영예가 될지 아니면 치욕이 될지를 헤아리고 또 감당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몫이다. 그리고 매번 논란이 되고 있음에도 그런 상이 끈질기게 지속되고 있는 그 속사정을 헤아리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2017.7.13.(목) 국제신문 본지 30면 / 기사 전문 보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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