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번호
43130
작성일
2017.08.09
수정일
2017.08.09
작성자
조선경
조회수
12

[국제신문/인문학 칼럼]우리 시대에 통과의례가 필요한 이유 - 이국환 한국어문학과 교수

| [국제신문/인문학 칼럼]우리 시대에 통과의례가 필요한 이유 - 이국환 한국어문학과 교수

 

   

 

 

 

 

[국제신문/인문학 칼럼]우리 시대에 통과의례가 필요한 이유
- 이국환 한국어문학과 교수

 

 

 

 

 

 

이국환
한국어문학과 교수

   다산 정약용은 병신년 2월 15일 관례를 올리고 숙부 정재진과 한양으로 떠나 한 살 연상인 홍혜완과 혼례를 치르는데, 그때 다산의 나이 15세였다. 다산은 관례와 혼례라는 통과의례를 거치며 어른이 되었고, 낯선 서울에서 그의 삶에 중요한 변화를 겪는다. 이 시기에 다산은 '회현방에서 홍운백과 함께 술을 마시며' '여름에 읍청루에서 제공을 모시고 술을 마시며' 등의 시를 읊으며 선배들과 어울려 새벽까지 통음하였다.

 



   
그해 8월 15일 장인 홍절도가 평안북도 운산으로 귀양을 가자, 다산은 추운 북방으로 귀양 가는 장인에 대한 걱정과 장인을 귀양 보낸 부당한 권세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란 정세 분석까지 시에 담는다. 다산의 예상대로 장인이 이듬해 11월 해배되어 돌아오니, 15세의 다산은 이미 아이가 아닌 어른이었다.

 



   
당시 다산의 나이는 요즘 '중2병'이라 불리는 청소년기이다. 물론 다산의 시대는 청소년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청소년은 근대적 존재이며, 근대 사회에서 설정된 새로운 인간발달 단계이다. 여기서 근대는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성립에 따른 새로운 질서 형성과 국가 주도 학교 교육의 제도화를 의미한다. 중등교육의 보편화로 아이와 어른으로만 구분되던 인생 주기에 청소년이라는 중간 존재가 탄생한 것이다.

 



   
근대 초기 공장 중심의 도시화가 이루어지며 아이들은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 기업가들은 아동 노동 금지 법률을 준수하라는 압박을 받았고, 결국 노동현장에서 아이들은 해방됐다. 일터를 벗어난 아이들은 거리로 쏟아졌다. 기운 넘치는 이들의 비행은 사회 문제가 되어 그 해법으로 학교 교육의 의무화가 제시되었다. 국가는 법에 근거하여 아이들을 학교로 몰아넣었으며, 학제에 따라 재학 연한이 연장될수록 청소년이라는 존재가 구체화하여 다산과 같이 15세에 어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미셸 푸코는 '감옥의 역사'라는 부제가 붙은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학교가 감옥과 닮은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님을 밝힌 바 있다. 지금의 학교는 분명 긍정적 기능이 크다. 그럼에도 초기 학교가 그러했듯 여전히 학교는 '가둠'의 기능에 충실하며, 학교 밖에서는 모성의 보호 본능과 결탁한 사교육이 '가둠'의 기능을 연장하고 있다. 이제 대학마저 취업을 위한 학점과 스펙 관리로 이들을 가두면서 청소년도 어른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 아이인 듯 아이 아닌, 아이 같은 어른이 거리에 가득하다.
'해님 달님' 혹은 '해와 달이 된 오누이'로 알려진 전래동화는 신화학과 문화인류학의 관점으로 보면 어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와 관련이 깊다. 호랑이에게 떡은 물론이고 팔과 다리 몸통까지 내어주고 머리만 남은 어머니는 오누이가 남겨진 집을 향해 데굴데굴 굴러간다. 자식을 보호하려 머리만 굴려 오두막으로 향하는 어머니의 보호 본능은 처절하다. 하지만 호랑이가 어머니의 뒤를 밟아 오두막을 찾았으니, 그 보호 본능이 오히려 오누이를 위험에 처하게 하였다는 사실을 어머니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어머니는 처음 자궁 속에서 아이들을 보호했고, 아이들이 자란 후에는 오두막에 가두어 보호하려 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보호막이 사라지자 오누이는 결국 생사를 넘나드는 위험을 극복하며 자신들의 힘으로 호랑이를 따돌리고 해와 달이 된다. 어머니가 자녀를 분리하는 것은 자신의 팔과 다리를 모두 자르는 것만큼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처음 몸의 탯줄을 잘라 자신의 아이를 분리했듯, 아이가 어른이 되려면 어머니는 마음의 탯줄을 잘라 아이를 품에서 내보내야 한다.

 



   
자녀를 내놓지 않고 품으려는 어머니의 보호 본능이 고래 심줄처럼 강하다면 어머니의 품에서 안주하려는 자식의 본능도 늑대 심줄 정도는 될 것이다. 그래서 양육이 끝난 다 큰 자녀를 부양하는 세태가 벌어진다. 우리 시대에도 통과의례가 필요하다. 통과의례는 분리와 전이, 결합의 과정으로 설명된다. 아이들은 일상으로부터 분리된 공간에서 낯선 경험을 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을 통해 어른이 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 시기에 아이들을 학교와 부모의 울타리에 가두고 있다. 가두면 교화는 할 수 있어도 성장할 수는 없다. 그렇게 어른이 되는 것은 세속화를 의미할 뿐 진정한 성장과는 거리가 멀다.

 



   
통과의례가 사라진 사회에서는 아이 같은 어른과 어른 같은 아이가 뒤섞여 살아간다. 나이가 들어도 적절한 역할을 주지 않은 채 보호 대상이 되며, 자기를 탐색하는 삶의 여정은 공동체의 조력 없이 개인 과제로 남겨져 혼돈 속에 살아간다. 원시시대의 어른들은 어른이 될 아이를 깊은 동굴로 이끌거나 넓은 들판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통과제의를 마친 후 자신들의 세계에 합류시켰다. 문제는 우리 아이들이 학교를 너무 오래 다니고, 부모 품에 너무 오래 머문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 공동체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통과의례가 무엇일지, 어른들이 함께 고민해 보았으면 한다.

 

 

[2017.7.6.(목) 국제신문 본지 31면 / 기사 전문 보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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